버려진 존재들의 분노와 슬픔
『너의 목소리가 들려』 개정판
김영하 등단 25주년을 맞이해 시작된 ‘복복서가×김영하 소설’ 시리즈 2차분 6권 가운데 앞서 출간된 『오직 두 사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빛의 제국』에 이어 나머지 3종이 모두 출간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소설은 김영하식 슬픔의 미학을 볼 수 있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 한국의 이십대 또는 이십대적인 삶을 그려낸 『퀴즈쇼』 그리고 충격적인 첫 소설집 『호출』이다. 작가 스스로 우울에 침잠하여 쓴 고아들의 이야기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버려진 존재들의 삶을 파격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취약성을 보여주며, 이와 동시에 구성원에 대한 돌봄을 수행하지 못하고 붕괴해가는 사회구조를 드러낸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대폭주가 사라진 시대에서의 감회를 담은 ‘작가의 말’을 새로 실었다.
고아에 대한 고아의 기억과 증언
이 소설은 제이의 삶의 궤적을 따라 진행된다. 고속터미널의 화장실에서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제이는 그를 돌봐주던 양어머니가 마약중독자가 되어 그를 버리고 도망간 바람에 중학교 졸업도 못하고 기아와 폭력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후 철거예정구역 빈집에 숨어살다가 경찰에 붙잡혀 지방의 어느 보육원으로 인계되고, 그곳을 탈출해 서울로 돌아온 다음에는 거리를 전전하기 시작한다. 다른 가출청소년들과 방종하고 난폭한 생활을 같이하기도 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수련과 학습을 하기도 하다가 폭주족의 리더가 되기에 이른다. 제이는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나는 길과 길이 만나는 데서 태어났대. 앞으로도 계속 길에서 살게 될 것 같다는, 그런 예감이 있어.”
이런 제이의 삶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이는 동규다. 어린 시절부터 제이와 운명처럼 맺어진 또다른 고아 동규는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스스로를 불청객이라 칭한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삼촌과 엄마가 ‘각별한 사이’로 돌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동규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 함구증을 앓는 동안 동규는 제이와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다. 말하지 못하는 그 대신 제이가 그의 속내를 읽고 사람들에게 번역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동규의 함구증이 낫고 제이가 폭주족의 리더가 되면서 복잡한 양가감정을 띠게 된다. 이번엔 동규가 평생 제이의 ‘분신’으로 그의 존재를 증언하고 기록하는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그러나 동규가 제이의 이야기를 누군가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증언을 시작했을 때, 그것은 제이만을 위한 것도 동규 자신만을 위한 것도 아닌 양자 모두를 위한 일이 되었다. 동규의 증언은 둘 사이의 양가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시도였기 때문이다.
제이를 기억하는 이는 동규만이 아니다. 한때 제이와 스친 적이 있는 다른 인물들 또한 제이가 남긴 자국을 아프게 들여다본다. 길에서 제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에게 매료되는 목란,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제이를 쫓는 게이 경위 박승태, 제이에게 집과 음식을 내어주고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 Y 그리고 길 위의 수많은 고아들까지, 우리는 그들이 제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며 그들의 비극을 엿본다. 그리고 유사한 방식으로 이 소설을 읽는 우리는 제이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슬픔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손을 들어 우리의 아픈 손가락을 보라
그렇다면 제이는 누구인가? 소설에서 제이라는 인물은 ‘증언들’에 의해 꽤나 영웅적으로 심지어 신화적으로 묘사된다. 증언들은 서로 교차하며 증폭하고, 독자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 의문이 결국 도달하는 곳은 제이의 정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슬픔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기억과 우리에게 가능한 증언일 것이다. 무엇에 대한? 우리의 아픈 손가락에 대한. 제이는 “분명히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나오는 ‘대폭주’가 사라진 지금, 그들은 이 사회에서 더욱 철저하게 지워졌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지금 여기 “대폭주를 상상할 수 없는 독자들”의 눈앞에 고아들의 분노와 슬픔을 들이민다. 그리하여 우리는 번갯불처럼 깨닫게 될 것이다. 여전히 고아들은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또한 세상에 내던져진 고아라는 것을.
■ 추천의 말
소년, 반쯤 열린 문 안쪽의 세계. _함정임(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김영하는 이 작품에서 동규의 일인칭 회상으로부터 와이드스크린 같은 전지적 시점으로, 정체 모를 경찰관과 작가 자신의 시점으로까지, 기어를 바꾸듯 화자를 바꾼다. 그렇게 클라이맥스의 오토바이 질주를 따라가면서 해답보다 많은 질문을 남기는 놀라운 대단원으로 향한다. 작가는 가장 볼품없고 가장 이상한 인물에게조차 깊은 연민과 공감을 보여주는데 그리하여 이 작품은 서울에서 위태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한 전경이 되었다. _커커스 리뷰
눈을 뗄 수 없이 재미있다… 작가는 가장 뛰어난 부분을 기적 같은 마지막장을 위해 남겨두는데 그것은 귀하고 특별하다. _John Darnielle(작가)
도시의 이면과 십대 갱에 대한 이 어두운 이야기는 태어나자마자 버스터미널에 버려진 어느 고아의 고난을 그린다… 제이가 이끄는 무리에 합류하면서 위안을 얻게 된 동규가 제이를 향해 품는 모든 감정, 동경에서부터 격렬한 질투심까지 생생하다… 작가는 거리를 떠도는 십대들의 참상을 가감 없이 비추며 그들의 분노, 권태, 취약성을 포착한다. _퍼블리셔스 위클리
■ 차례
1장 013
2장 063
3장 125
4장 181
5장 247
개정판을 내며 294
■ 책 속에서
그들은 나 없는 세상에서 행복했다. 혹시 내가 사라져야 저들이 다시 저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없는데도’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없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닐까? _28쪽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고통을 외면하는 거예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돼요.” _77쪽
너희는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너희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로 인해 아프다. _147쪽
그럼 우리가 느끼는 건 뭐야? 분노야. 씨발, 존나 꼭지가 돈다는 거야. 그래, 우리는 열받아서 폭주하는 거야. 뭐에 대해서? 이 좆같은 세상 전체에 대해서. 폭주의 폭 자가 뭐야? 폭력의 폭 자야. 얌전하면 폭주가 아니라는 거지. 엄청난 소리를 내고, 입간판을 부수고, 교통을 마비시킬 때, 그제야 세상이 우리를 보게 되는 거야. _170쪽
가난한 십대는 외국인 불법체류자와 비슷한 급의 천민이었다. 최저시급을 받고 비천한 대접을 감수하면서도 항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_172쪽
제이는 자신의 영혼이 그의 육체를 떠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이전에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 떠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어디에도 깃들지 못한 채 내내 떠돌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하여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모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_242~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