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센세이션에서 명중한 예언적 자화상으로! 『빛의 제국』 개정판
김영하 등단 25주년을 맞이해 시작된 ‘복복서가×김영하 소설’ 시리즈 2차분 3종이 출간되었다. 김영하라는 이름을 문단과 대중에 뚜렷이 각인시킨 첫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분단 이후 한국 문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빛의 제국』, 그리고 비교적 최근작인 소설집 『오직 두 사람』이다. 북으로 귀환명령을 받은 남파간첩의 24시간을 긴박하게 묘사한 『빛의 제국』은 냉전문학의 이념적 계보를 스파이스릴러라는 장르로 해체해버리고, 신념과 가치의 경계가 허물어진 곳에서 인간 실존의 의미를 묻는 문제작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기존판에는 없었던 작가의 말을 싣고 오류를 바로잡았다.
『빛의 제국』 을 읽는 한국인, 『빛의 제국』 을 읽는 외국인
한국 작가의 소설이 경쟁 입찰 등을 통해 해외 출판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번역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무렵부터이다. 김영하는 이 새로운 흐름의 선두에서 문을 연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그의 소설은 도발적 소재, 거침없는 속도감, 유려한 스타일로 아시아 작가에 대한 서구인들의 ‘이국적 호기심’의 허를 찔렀다. 2006년 한국어 초판이 출간된 『빛의 제국』은 지금까지 미국, 프랑스, 독일 등 17개국 출판사와 판권 계약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2010년 『빛의 제국』 영어판이 출간되었을 때만 해도, 미국 아마존 톱100 순위에 랭크된 최초의 한국 소설가라는 사실이 신문에 기사화되었을 만큼, 한국문학은 아직 세계문학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빛의 제국』이 해외 독자들에게 소개되고 수용된 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빛의 제국』의 영어 제목 ‘Your Republic Is Calling You’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거의 잊고 지내는 사실, 우리가 1945년 이래 줄곧 분단국이었음을 날카롭게 환기시킨다. 남파간첩 김기영의 서사가 발붙이고 있는 사실성은 다름 아닌 우리의 분단현실에서 나오고, 그래서 이 소설은 실제보다 더 ‘정치적’으로 비쳐진다. 여러 해외 리뷰들이 『빛의 제국』에서 소설의 형식을 취한 유사(類似)현실을 읽어내는 이유다. 그에 반해 조국 분단의 비극이 익숙하다 못해 진부해져버린 한국 독자들은 21세기 간첩의 블랙코미디 같은 하루를 시대의 센세이션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실체 없는 이념의 형해를, 바뀐 세기에 걸맞은 허무를, 추구도 지향도 불분명한 시대의 탈정치성을 투영하는 듯 보였다.
세 개의 나라, 세 가지 실존: 사이보그, 부적응자, 불법이민자
스파이 김기영은 북한, 1980년대 남한, 21세기 남한이라는 “세 나라”를 겪은 예외적 소수자다. 북한에서 그는 ‘개인’이 아니었으며, 1980년대의 남한에서 그는 주사파 운동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평범한 중년 가장 김기영은 자신이 다만 불법이민자에 불과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어쩌다보니 이곳에 정착하게 됐고, 잘 적응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고.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본래의 내가 누구였는지 모르겠다고. 아무렴 어떠냐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진짜 스파이가 암약하고 있는 나라, 전 세계의 유일무이한 장기 휴전국의 중견 소설가가 그린 스파이 김기영은 어째서 이토록 무력하고 세속적인가. 권총도 비정함도 탄탄한 복근도 모두 잃어버린 타락한 간첩 김기영은 자본주의의 영광을 치장하지도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웅변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빛의 제국』이 도달한 남다른 핍진성이다. 허구적 상상력의 빈틈을 파고들어 현실을 정교하게 복원할 때, 독자는 지금껏 지각하지 못했던 냉엄한 실존의 조건에 새삼스러운 눈길을 던지게 된다.
운명에 대한 명상, 또는 내 삶의 주인 되기
김기영은 한번도 자기 삶의 주도권을 쥐어본 적이 없고, 자의로 무엇을 선택할 기회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같은 운동권 출신인 대학 동창과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기르고, 서울 시내에 아파트를 장만하고, 영화수입업자로 무난히 밥벌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깜빡 잊고 있던 운명이 그를 소환한다. 이 ‘부름’은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일상에 매몰된 삶’의 소중함을 부각시키고, 인간 존재의 항구적 불확정성을 폭로한다. 김기영의 갈등은 전형적인 현대인의 신경증, 자아 찾기를 지상과제로 추구하는 동시에 몰개성과 익명성 속에서 편안하게 자아분열을 즐기는 현대인의 이중성과 일맥상통한다.
오랫동안 『빛의 제국』의 의의는 한국 현대 정치사와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설명되었다. “역사와 개인의 문제를 균형있게 포착해 힘있는 서사로 풀어냈다”는 만해문학상 수상작 선정 이유는 그러한 시각을 잘 압축하고 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2017년, 프랑스에서 연극으로 상연된 『빛의 제국』을 리뷰하면서 《르몽드》지가 분단국가의 상징인 스파이 김기영을 가리켜 “삶의 연속성을 상실함으로써 파편화와 자기소외에 시달리는 분열적 존재”라고 했을 때, 마침내 『빛의 제국』은 역사와 현실의 특수성에서 벗어나 오롯이 한 편의 소설로, 보편문학으로 읽히고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어느 누구도 자기 생에 대해서만은 정치적일 수 없고, 매일을 필사적으로 살고 있어도 자기로부터 분리된 채로는 생의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빛의 제국』은 극단적 조건에 놓인 한 사람을 통해 평범한 하루하루의 유의미를 깊이 명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김영하의 소설들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묵직하고 성찰적인 작품이 되었다.
■ 추천의 말
역사와 개인의 문제를 균형 있게 포착하여 우리 일상과 풍속에 탁월하게 결합시켰으며 근래 보기 드문 힘 있는 서사로 풀어낸 수작이다. ―만해문학상 선정 이유 중에서
그리스 비극의 스파이소설적 버전, 그 자유자재의 전복. 『빛의 제국』은 그 현대적 각색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신수정(문학평론가)
『빛의 제국』은 자유, 책임, 그리고 불가피성에 대한 흥미롭고도 도발적인 소설, 서스펜스와 명상을 동시에 해내는 진귀한 소설이다. —딘 바코풀로스Dean Bakopoulos, 소설가
외부인에게 남북한의 분단은 주로 지정학적 위협의 측면이 부각된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그것은 언제나 기이한 형식으로 작용하는 정체성 위기의 문제다. 카프카적 초현실주의와 아이러니를 뛰어나게 구현하는 한국 소설가 김영하의 문학 스릴러 『빛의 제국』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존 파워스John Powers, NPR
모든 인간이 근원적으로 갖고 있는 빛과 어둠의 불균등한 상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장을 펼친 이후 마지막까지 한달음이다. ―강정(시인), 동아일보
평범한 인생과 그 내면의 욕망에 대한 과감한 찬가이자 저항할 수 없는 소설 ―르 몽드
■ 차례
AM 07:00 말 달리자 _009
AM 08:00 꿈을 꾸는 문어단지 _027
AM 09:00 너무 일찍 도착한 향수 _050
AM 10:00 권태의 무게 _075
AM 11:00 바트 심슨과 체 게바라 _094
PM 12:00 하모니카 아파트 _110
PM 01:00 평양의 힐튼호텔 _166
PM 02:00 세 나라 _205
PM 03:00 쇄골절흔 _228
PM 04:00 볼링과 살인 _231
PM 05:00 늑대 사냥 _280
PM 06:00 Those were the days 289
PM 07:00 처음처럼 _319
PM 08:00 모텔 보헤미안 _340
PM 09:00 프로레슬링 _360
PM 10:00 늙은 개 같은 악몽 _369
PM 11:00 피스타치오 _402
AM 03:00 빛의 제국 _416
AM 05:00 변태 _420
AM 07:00 새로운 하루 _422
개정판 작가의 말 _425
작품 바깥의 말들 _435
■ 저자 소개
지은이 : 김영하
소설가. 장편소설로 『작별인사』『살인자의 기억법』 『검은 꽃』 『아랑은 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 소설집으로 『오직 두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오빠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호출』이 있다. 여행에 관한 산문 『여행의 이유』와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냈고 산문집으로 『보다』 『말하다』 『읽다』의 합본인 『다다다』 등이 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아내와 함께 살며 여행, 요리, 그림 그리기와 정원 일을 좋아한다.
■ 책 속에서
그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가슴 한쪽이 시큰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감정에 일일이 어떤 표식을 부착할 수 있다면 누군가는 그 순간의 그의 감정을 ‘너무 일찍 도착한 향수鄕愁’라 명명했을 것이다. 갑작스레 귀환 명령을 받은 그로서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이제 다른 방식으로 감각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것은 일견 장기 여행자가 짐을 꾸리는 것과 비슷하다. 정신적으로 그들은 이미 여행지에 속해 있다. 그래야 그곳에서 필요한 것들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 그들이 샴푸와 속옷, 안대와 손톱깎이를 챙기듯 이 세계의 이미지와 소리와 냄새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훗날의 소용, 향수라는 아주 사치스러운 소비를 위한 재료들이었다._ 54쪽
낡고 오래된 필름과 그것을 보러 오는 사람들, 그들은 서로에게 무심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속물들의 허세로부터 비롯된 이상한 편안함이었다. 속물이 속물인 것을 감추려면 쿨할 수밖에 없다. 쿨과 냉소가 없다면 그들의 속물성은 금세 무자비한 햇빛 아래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 대도시의 익명성은 세련을 가장한 이런 속물성 덕분에 유지된다. 다시 말해 이곳에선 누구든지 모습을 감추고 살 수 있다._ 110쪽
어쩌면 기영은 시네마테크를 기웃거리는 영화광들이 드러내는 권태에 주눅들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 그런 건 너무 지겹지 않냐?”라고 그들이 심드렁하게 내뱉는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겐 미지의 것이거나 적어도 참신한 것이었다. 도대체 ‘그런 것’의 어떤 면이 진부한 것인지 알기 위해 그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해야 했다. 진부함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옮겨다 심은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있었다. _112쪽
그녀가 눈을 빛냈다. 대학 시절의 그녀를 보는 것 같았다. 기영은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슬픈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어린 모습을 간직한 채로 늙어가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늙어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년은 늙어 늙은 소년이 되고 소녀도 늙어 늙은 소녀가 된다. _311쪽
그녀는 문득, 엄마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런 일이 과연 자신의 인생에 닥쳐올까, 따위를 생각했다. 아까의 키스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어떤 일들이 어느샌가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 혹시 그런 게 인생이 아닐까._3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