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쓰고 싶은 소설이 있다”
역사와 기억의 저편으로 스러진 모든 이들을 위한 진혼의 대서사시
『검은 꽃』은 대한제국이 “물에 떨어진 잉크방울처럼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던 1905년, 좋은 일자리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들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민사를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김영하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멕시코와 과테말라로 떠나 자료를 모으고 현지를 답사한 후, 그곳에서 머물며 집필을 시작했다. 일견 감상주의적인 민족 수난사처럼 보이는 이 소설은 그러나 시작부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대륙과 대양을 가로지르는 대담하고 활달한 작가의 필치를 따라가다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모든 것들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붕괴하는 세계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봉건과 근대가 부딪치고, 토착 신앙과 외래 종교가 갈등하며, 신분과 계급이 무너지고,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허물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간 운명의 절대적 조건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생존과 존엄성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를 그리는 김영하의 묘사는 객관적이고 냉철하며 아이러니로 가득차 있다. 때로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어조는 담담하지만 이야기들은 용광로처럼 뜨겁다. 이렇듯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 뚜렷한 중심인물 없이 다양한 인물들을 따라가며 전개되는 모자이크식 구성은 그 자체로 이 소설의 지향점이 민족 수난사의 감상주의적 제시가 아니라, 불운과 맞서 싸우지만 끝내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 일반의 운명을 드러내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진부한 소설 문법을 혁신하려던 젊은 작가 김영하의 문학적 야심이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검은 꽃’이라는 제목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검은 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꽃이에요. 검은색은 모든 색이 섞여야지만 가능한 유일한 색으로 남녀노소, 계층, 문화, 인종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꽃이라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야겠죠.” 『검은 꽃』은 가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를 갈망하지만 결국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 잊혀져버린 모든 인간들에게 작가가 보내는 ‘조화弔花’일 것이다.